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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야기

[일본 인물] 근대 일본 경제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渋沢栄一

시부자와 에이이치(1840~1931)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왜 갑자기 시부자와 에이이치인가?

2019년, 일본의 이전 천황이 연로하여 물러나고 새 천황이 즉위하면서, 헤이세이 시대에서 레이와(새로운 연호) 시대가 되었다.

우리나라 감성으로는 잘 이해가 안되지만, 일본인들은 공식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천황이나 연호에 대한 마음이 남다른 것 같다.

레이와 시대를 맞으면서, 정부나 기업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들도 적잖이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일본의 지폐에는 1만엔, 5천엔, 1천엔권이 있다.

새로 선정된 인물로, 1만엔권에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5천엔권에 여성교육의 선구자 쓰다 우메코, 

1천엔권에 의학자 기타사토 시도사부로가 확정되었다.

그 중 특히 1만엔권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올해가 사망 후 90년이 된 해로, 많은 일본 언론들이 특집을 다루고 있다.

특히 NHK에서는 대하드라마를 기획하여 올해 2월 14일부터 일요일마다 방영중이다.

서점에 가면 어느 서점이든 항상 베스트셀러 중에 시부사와 에이이치에 관한 책이 올라와 있고, 

한 쪽 편에 시부사와 에이이치에 관한 책들로만 진열된 진열대가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나도 관심이 생겨서 그에 대해서 알아볼겸 포스팅을 해본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무엇을 한 사람인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에서 "근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라든가 "근대 일본의 창조자" 로 불린다.

시부사와가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근대 일본의 토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수식어가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주식회사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시즈오카 상법회소"이다. 

유럽 시찰 중 프랑스에서, 소자본을 모아 대자본으로 삼는 합본주의를 처음 접한 시부사와가, 

자본이 부족한 일본에서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하여 처음으로 설립한 것이 이 시즈오카 상법회소이다.

현재의 주식회사 개념으로 보면 된다.

시부사와는 시즈오카 상법회소를 설립하고 대표가 되었는데, 

물가가 떨어졌을 때 쌀과 비료 등을 매입해두었다가 비싸졌을 때 팔아, 시즈오카 번에 막대한 이익을 남겨주는 성공을 거둔다.

사회복지사업

시부사와는 논어의 가르침을 중시하며 도덕의 중요함을 이야기했고, 사회복지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도쿄양육원을 설립하여 원장을 역임했다. 빈민, 병자, 고아, 노인, 장애인을 보호하는 시설로, 시부사와의 사회복지사업이 이어져내려온 것이 현재 일본의 복지사업이다. 

500사 이상의 기업 설립

시부사와는 금융, 교통, 통신, 섬유, 제지, 식품, 철강, 운송용기기, 화학, 광업, 농림수산, 가스, 전기, 건설, 증권거래소, 창고, 호텔, 무역, 인쇄, 전기기기, 서비스, 경제단체 등의 분야에 걸쳐, 500사 이상의 기업을 설립했다.

대체로 설립 후 실무는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맡기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일본 최초의 은행

시부사와가 대장성(과거 일본의 행정기관. 현재는 재무성과 금융청으로 이관됨)에서 퇴임한 뒤, 실업가로서 처음으로 설립한 것이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으로, 일본 최초의 은행이다. 이 또한 주식회사 형식으로 자본을 모아, 미츠이그룹, 오노그룹과 함께 운영하며 시부사와가 총감(대표)를 맡는다. 

교육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시부사와가 중시한 것은 실학교육이다. 상법강습소(현 히토츠바시 대학), 오오쿠라고등상업학교(현 도쿄경제대학) 등을 설립하였고, 이외에도 설립에 관여한 학교가 160여개.

여성 교육의 필요성 또한 주장하여, 도쿄여학관, 일본여자대학 등을 설립.

민간외교

1909년 결성된 도미실업단을 시작으로, 민간인으로서 다양한 국제교류에 열의를 보였다. 

시부사와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개선을 일생의 과제로 보고 있었다.

미일 관계개선에 대한 공로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다.

끝으로

일본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기존 1만원권에 얼굴이 그려진 후쿠자와 유키치도,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도,

한국인들이 볼 때는, 조선 침탈에 관여한 부분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1850년대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에 비해 국력이 미미했던 일본을 단기간에 열강의 반열에 들게 했고,

또 그 당시 쌓아올린 기틀이 지금까지도 일본의 토대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잘못된 일들은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으나, 한 명이 한 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업적이 많은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참고자료:

時空旅人 別冊 渋沢栄一 士魂商才を貫いた先駆者

https://keiei.proweb.jp/column/a037/86/2002/2839/